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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조산대부(朝散大夫) 군수(郡守) 휘 길(佶)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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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년生(인조20) ~ 1701년卒(숙종27.59세)
15世 인영(仁英)-16世 은(訔)-17세 사안(師顔)-18세 인(璌)-19세 한기(漢驥)

20世 조산대부(朝散大夫) 군수(郡守) 휘 길(佶)公 墓
公의 증조부(曾祖父)는 장사랑 휘 사안(師顔)公 이시며 조부(祖父)는 은일교관 휘 인(璌)公이시며 부(父)는 수군절도사 휘 한기(漢驥)公이시다.
공은 부친(父親)이신 휘 한기公에 이어 무과에 급제한 후 1685년(숙종11)에 무과 급제자등 무관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시는 훈련원 주부(종6품)를 담당하셨고, 1686넌(숙종12)에는 수우후(水虞候.정5품)에 임명되셨는데 수우후(水虞候)는 수군절도사가 사정으로 자리를 비울 때 군사 업무 전반을 관장·처리하는 것이 핵심 임무였다. 부친(휘한기)과 숙부(휘운기)를 이어 수군(水軍)에서 근무하셨다
1696년(숙종 22)에는 무과시험의 감독관의 임무를 감당하시고 그해 보성군수(寶城郡守.종4품)에 임명되셨다.
보성(寶城)은 임진왜란때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한 조선수군이 일본군에 대패하자 선조가 바다를 포기하고 권율 도원수를 도와 육지에서 싸우라는 어명을 내렸을 때 이순신 장군께서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라는 장계를 쓰신 곳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군수(郡守)는 문관 종사품(從四品) 외관직(外官職)으로 군(郡)의 행정(行政)과 일반 국민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역할이었는데, 公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신 후 무관(武官)으로서 훈련원과 수군에서 봉직(奉職)했는데 문관(文官)으로 군수(郡守)애 임명(任命)되실 만큼 문(文)과 무(武)를 겸비(兼備)하셨다.
公의 배(配)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휘 연현(延顯)의 딸 영인(令人)수성 최씨이며 子는 휘 광익公.휘 광직公.휘 광운公. 휘 광철공 4男과 2女를 두셨다
公의 墓는 조부(휘 인公)와 부(휘 한기公)의 墓가 있는 용인 공세동선영에 영인(令人) 수성 최씨와 합부(合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