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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가선대부(嘉善大夫) 제주목사(濟州牧使) 휘 의(義)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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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生(효종 1) ~ 1722년卒(경종2.72세)
15世 인영(仁英)-16世 은(訔)-17世 사안(師顔)-18世 인(璌)-19世 운기(雲驥)

- 20世 가선대부(嘉善大夫) 제주목사(濟州牧使) 휘 의(義)公 墓-
公의 증조부(曾祖父)는 장사랑 휘 사안(師顔)公 이시며 조부(祖父)는 은일교관 휘 인(璌)公이시며 부(父)는 수군첨절제사 휘 운기(雲驥)公이시다.
公은 계유(癸酉)1693년(숙종19年) 급제(及第).출사(出仕)하여 현령(縣令)을 거쳐 무자(戊子)1708년(숙종34)에 금부도사(禁府都事.종5품)에 임명되었고
안산군수(安山郡守.종4품)로 재직(在職)중에 병환(病患)으로 사직(辭職)하시고 낙향(落鄕)하여 건강(健康)을 회복(回復)하시고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셨다.
숙종의 경신(庚申). 기사(己巳). 갑술(甲戌) 환국정치(換局政治)로 수없이 많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세력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하자, 무술(戊戌)1718년(숙종44년)에 숙종(肅宗)이 조정(朝庭)에 출사(出仕)할 인재(人才)를 구할 때, 公의 덕행(德行)과 지방관으로서 행정 경험과 무신으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아, 행정적 기능 외에 군사적인 기능 수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주목사(濟州牧使.정3품)로 천거(薦擧).임명(任命)되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의 평균 재임 기간이 대략 1년 10개월 정도로 업무의 강도가 매우 중(重)하여, 公 또한 근무(勤務)하시다가 병환(病患)을 얻어 임인(壬寅) 1722년 8월(경종2년)에 사직(辭職)하시고 한양(入漢陽)으로 회로(回路)하시는 중에 해상풍랑(海上風浪)으로 병세(病勢)가 악화(惡化)되어 해남군 화산면 갈두에 상륙(上陸)후에 이틀동안 신음(呻吟)하시다가 임인(壬寅)1722년(경종2년) 9월 9일에 공의 나이
72세로 별세(別世)하셨다.
公의 별세 소식이 수원(水源)에 전해진 후 장남(長男)이신 휘 광규公께서 해남(海南)으로 내려오셔서 부친(父親)의 장례(葬禮)를 치르고, 의지할 곳 없는 혼자 몸으로 3년상을 모셨지만 부친을 놔두고 고향(故鄕)으로 가는 그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지극(至極)하고 애절(哀絶)한 효심(孝心)이 21世 휘 광규公을 해남(海南)에 정착(定着)하게 하셨고, 公의 후손(後孫)들이 해남.강진.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전국(全國)으로 뻗어 나가 오늘 첨사공파를 이루어 번창(繁昌)하고 있다
公의 배(配)는 휘 시령(時良)의 딸 숙부인(淑夫人) 진천 송씨이며 子는 휘 광규公이시다
公의 묘(墓)는 화산초등학교 뒷산 기슭 가좌리에 모셨다가 1999년 4월에 현산면 덕흥리 선산(先山)으로 모셔 와 진천 송씨와 합부(合祔)하여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