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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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1.png16世 전한(典翰) 증 부제학(副提學) 휘() 응()

 

1490년生(성종 21) ~ 1522년卒(중종 17. 33세)

 

11世 양생(良生)→12世 구(矩)→13世 효경(孝卿)-14世 수(穗)-15世 인후(仁厚)

 

公의 증조부(曾祖父)는 경산 현령 휘(諱)효경公이시며, 조부(祖父)는 고양군수 증 형조참의 휘 수(穗)公이시며 부(父)는 돈녕부정(敦寧府正) 휘(諱)인후公이시다. 전배(前配)는 영의정 신숙주의 후손인 부사(府使) 濂(렴)의 딸 고령 신씨이며 후배(後配)는 정랑(正郎) 완(浣)의 딸 연일 정씨이다. 두분 配(配)에게서 아들은 없고 딸 셋을 두셨다

 

공의 자(字)는 응(應之)  호(號)는 소우당(素愚堂)이다

1507년(중종 2) 공의 18살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에서 100명중 3등으로 합격하셨고.1514년(중종9) 공의 25살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21명중 을과 2등(전체3등)으로 급제(及第)하셨다.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초수(初授) 되었으며 1516년 김정(金淨), 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뒤 전경, 저작, 박사를 역임하였고 이어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재임 중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혁파 등 구제(舊制)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에 승보(陞補)되었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대사헌(大司憲) 이행(李荇)을 탄핵하여 면직하게 하였으며, 그 뒤 예조, 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다.

 

1518년 지평(持平)으로 전보되었는데 이때 훈구파(勳舊派)로부터 조광조(趙光祖)를 영수로 하는 사림파(士林派) 집단으로 지목되어 고초를 격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성리학의 이론서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 뒤 헌납을 거쳐 1519년 이조정랑(吏曹正郎)을 역임한 뒤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전한(典翰) 겸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로 발탁되었다. 그해 겨울 훈구파인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의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 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청하였으며 결국 이에 연루되어 부여로 유배당하였고 1522년(중종17년) 적소에서 33세로 돌아가셨다

公의 사후(死後)에 부제학(副提學.정3품)으로 추증(追贈)되었고, 아들이 없어 대(代)가 이어지지 못했지만 승지 휘 인준公의 손자(孫子) 휘 숙하公이 제사를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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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한(典翰) 증 부제학(副提學) 소우당(素愚堂) 휘 응(譍)公 묘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