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해(註解)
동래정씨(東萊鄭氏) 을미보(乙未譜) 구발(舊跋) 1655
씨족(氏族)에게 족보가 있어온 지 오래인데 조상에게 자손이 있는 것은 마치 나무에 가지가 있고 물에 지류(支流)가 있는 것과 같다. 비록 한 줄기와 한 근원에서 나왔지만 가지와 지류가 나뉘다보면 나중에는 어지러워져 대수(代數)를 계산해 두루 알기가 어려우니 이 때문에 보첩(譜牒)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정씨(鄭氏)는 고려 때 복야공(僕射公)에게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셨는데 지금까지 족보가 없어 왔으니 어찌 우리 종족(宗族)과 자손들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지난 만력(萬曆) 을유년에 임당상공(林塘相公)께서 대략 초보(草譜)를 만들고 서문(序文)을 지어 발행했는데 널리 배포하지 못하고 또 난리를 겪어 지금은 등본(謄本)만 남아 있는 실정이며 그 후 뒤를 이어 편찬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여 선조에 대한 근원(根源)과 종족끼리의 의가 사라져 드러나지 않아 내가 이 점을 개탄해 왔다.
계사년 겨울에 내가 월성(月城: 경주(慶州)) 목사(牧使)에 임명되어 출발하면서 영의정(領議政) 상공께 인사를 갔더니 족보를 편찬해 보라고 권하셨는데 그 말씀이 매우 정중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이는 제가 뜻을 두었으나 미처 하지 못한 일인데 감히 말씀을 받들지 않겠습니까?>하였다. 경주에 부임하여서 뜻이 같은 한두 분과 함께 보충해 편집해보니 상편(上篇), 하편(下篇) 두 권이 되었다. 감히 보첩 편찬하는 예(例)를 마음대로 변경하지 않았는데 본손(本孫)의 성(姓)을 쓰지 않은 것은 일가를 구별하려는 뜻이요 외손(外孫)은 삼세(三世)까지만 적은 것은 번거로움을 줄이려는 것이요 방주(傍註)에서 선대를 특별히 자세히 기록한 것은 선조를 잘 알도록 하려는 것이요 권말(卷末)에 한 파(派)를 별도로 기록한 것은 보계(譜系)를 잃었기 때문이다. 또 임당(林塘) 상공(相公)이 지은 서문을 맨 앞에 실었으며 명공(名公) 거경(鉅卿)의 행장(行狀)과 비문(碑文)을 끝에 부록(附錄)한 것은 후세로 하여금 보고 느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매우 합당하게 한 연후에야 절목(節目)이 분명하고 자세하고 간략함이 적당하게 되어 부자(父子)의 세대(世代)와 형제(兄弟)의 항렬(行列), 내외(內外) 대종(大宗), 소종(小宗)이 책을 열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되었으니 조상을 높이고 공경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어찌 조금이나마 보탬이 없겠는가? 보첩을 인쇄에 넘긴 지 한 달 만에 완간되었으니 실로 다행이라 하겠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함께 한 자는 외손(外孫)인 고양(高陽) 송희업(宋熙業)과 종인(宗人) 진사(進士) 홍석(弘錫)과 회(澮)이다.
아, 우리 선조께서 선(善)을 쌓아 가문을 일으킨 경사(慶事)가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일어나 구름처럼 몰려와 그 자손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사람의 마음이란 일가라도 멀어지면 소원(疎遠)하게 되고 더 멀어지면 더 소원해져 마침내 잊게 되니 그 친소(親疏)는 자신 때문이지 선조께서 친소를 둔 것이 아니다. 형(兄)의 아들을 어찌 달리 보시겠는가? 윗대로 올라가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이 보첩을 보는 우리 자손들은 선조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아 원근(遠近) 친소(親疏)를 두지 않는다면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불끈 솟아나고 일가간에 돈목(敦睦)하는 조가 실추(失墜)되지 않을 것이다.
을미년(乙未年) 계추(季秋) 하완(下浣)
二十一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경주목사(行慶州牧使) 정양필(鄭良弼) 삼가 발(跋)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