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7년(태조6년) 가대절수입안(家垈折受立案)-
문서발급처 : 한성부(漢城府)
수 취 인 : 정구(鄭矩)
현재소장처 : 서울역사박물관(동래정씨 승지공파 31世 휘 수현 기증)
한성부가 설치된지 2년 후인 1397년 한성부(漢城府)에서 세자(世子) 우필선(정4품) 직위에 계시던 설학재 정구(鄭矩)公에게 남부 훈도방(薰陶坊)의 집터 15부(負)(약500평)를 내려준다는 문서인데, 조선시대 立案으로는 최초의 것이라고 한다. 이 문서의 특징은 집터의 위치를 명확히 하고자 사방 경계에 대해 서술한 점인데 東쪽으로는 길과 접하고 南으로는 張忠信, 西로는 金潤, 北으로는 鄭節의 집과 맞닿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지에 대한 사적 매매를 인정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는 서울에 집을 짓고자 하는 이에게 적절한 규모의 땅을 내려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집터의 切給 조건과 적절한 규모에 대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성문화되었다. 서울에서 집을 지을 땅은 한성부에서 신청인의 所志를 받아서 내려주되, 빈터이거나 소지를 받은지 만 2년이 지나도록 집을 짓지 않은 垈地이어야 했다. 또 품계별로 折受 받을 수 있는 집터의 규모가 정해져, 3~4품관은 10부를 받을 수 있었다.
설학재公이 집터를 절수 받은 것 역시 이러한 정책에 따른 것인데, 후대의 규정에 비해 좀 더 큰 땅(15負)을 받은 것은『경국대전』이 완성되었던 성종 시기에 비해 나누어줄 땅이 좀더 여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부 훈도방(薰陶坊)의 집터는 지금의 회현동인데 문서는 설학재公의 장남이신 휘 효경公의 대를 이은 승지공문중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이유에서 인지 알 수는 없으나 회현동 집터는 설학재 구(矩)공의 동생인 휘 부(符)의 子 휘 흠지(증영의정)孫子 휘 갑손(증 좌의정). 휘 창손(영의정) 曾孫子 괄(좌의정)의 문경공파에게 넘어가 “회현동 정씨”라고 불리울 정도로 명성을 얻게 한 터전이 되었다는 사실이 설학재공의 직계손(直系孫)인 우리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